[칼럼] 품위 있는 공공언어와 '경로당'

조선왕조실록에는 기로소(耆老所)와 기로연(耆老宴)이라는 낯선 말이 등장한다. 기로소는 조선 시대에 나이 많은 관료의 친목과 예우를 위해 설치한 곳이고, 기로연은 나이 많은 신하를 대접하는 잔치의 이름이다. 세월이 흘러 기로소는 노인정과 경로당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최근에는 시니어 클럽 또는 시니어 센터라고도 한다. 영미권에서는 나이 많은 사람에게 ‘늙은(old)’이나 ‘노쇠한(aged)’ 혹은 ‘나이 지긋한(elderly)’처럼 나이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표현을 예의에 어긋난다고 여겨 상급생이나 고참을 뜻하기도 하는 ‘시니어(senior)’를 일상적으로 쓰고 있다. 나이 많은 사람을 배려한 말이라는 점에서 우리말로는 ‘어르신’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말이다.
이와 관련해 고유어는 촌스럽고 외국어는 세련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 국어 순화 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서울시는 2012년과 2013년에 경로당을 어르신 쉼터와 어르신 사랑방으로 이름을 바꾸어 부르자고 제안했고, 2024년에는 데일리뉴스가 경로당의 기능에 초점을 맞추어 어르신건강센터라는 이름을 제안한 바 있다. 문득 이런 말들이 얼마나 사용되고 있는지 궁금해 뉴스 빅데이터 분석이 가능한 빅카인즈에서 2024년 1년을 기준으로 검색한 결과, 시니어 센터는 5068회, 어르신 쉼터는 2031회, 어르신 사랑방은 411회, 어르신 건강센터는 148회 사용된 것으로 나타났는데, 같은 기간에 경로당은 24,998회나 사용되었다. 일본식 한자어인 ‘유치원’을 두고 차별적인 표현이기도 하므로 ‘유아학교’로 이름을 바꾸자는 목소리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는 사회에서 경로당이라는 꼬리표를 떼는 일이 그리 만만치 않은 모양새다.
그런데 마침, 어제 매일경제 시니어팀이 경로당을 노인들만 모이는 장소라는 부정적 인식이 있다며 젊은 세대와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하기 위해 경로당의 이름을 ‘어울림센터’나 ‘우리동네 사랑방’으로 바꾸자는 제안을 했다. 현재 전국적으로 7만 여 곳에 달하는 경로당이 있지만 매우 폐쇄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정작 신노년에게 외면까지 당하고 있어 변화가 필요한 시점에서 또 다른 대체어가 등장한 것이다. 이미 초고령 사회에 진입한 우리나라에서 이 목소리마저 외면한다면 어떻게 될까? 가뜩이나 태극기와 촛불로 상징되는 세대 갈등이 더 격화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경로당이라는 이름도 바꾸고 경로당의 담도 허물어 세대가 통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면 어떨까? 지금이야말로 어르신의 지혜가 필요한 때이다.
김형주(글말생활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