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뉴스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시대, 뉴스 문해력 교육과 쉬운 한국어 쓰기 교육이 필요하다
“뉴스를 신뢰하지 않고 회피하는 시대, 무엇이 문제일까?”
영국 옥스퍼드대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Reuters Institute for the Study of Journalism)가 최근 펴낸 ‘디지털 뉴스 리포트 2023’을 보면 한국 언론의 전반적인 뉴스 신뢰도는 28%로 나타났다. 이 수치는 조사 대상 46개 국가 중 41위의 성적이자 아시아·태평양 국가 중 최하위 성적인데, 이 조사에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순위가 아니라 수치이다. 뉴스 신뢰도가 28%란 말은 우리나라 국민 10명 중 7명 이상이 뉴스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응답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보고서의 전체 응답자 수는 46개국 93,885명이다. 이 중 우리나라 응답자는 2003명으로 50대 이상이 49.1%, 수도권 거주자 49.4%, 고소득자 43.8%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뉴스 신뢰도 28%라는 수치는 수도권에 거주하는 중산층 이상의 기성세대 의견이 좀 더 반영된 결과임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정치적 성향만 놓고 보면 진보 성향 33.7%, 보수 성향 24.2%, 중도 성향 33.9%로 나타나 중도 또는 진보 성향의 의견임을 감안해야 한다. 참고로 ‘디지털 뉴스 리포트 2023’ 한국어판에서 공개 여부를 두고 삭제 논란이 있었던 언론사별 브랜드 신뢰도 중 신문의 신뢰도는 한겨레가 40%로 가장 높고, 경향신문(37%), 중앙일보(36%), 동아일보·지역신문(35%), 조선일보(33%) 순으로 나타났다.
수도권에 거주하는 중산층 이상의 중도 또는 진보 성향의 응답자의 생각이 이렇다는 것은 참으로 참담하다. 뉴스 신뢰도 28%가 문제의 전부는 아니다. 왜냐하면 ‘디지털 뉴스 리포트 2023’에는 다양한 내용의 조사 결과가 포함되어 있는데, 한결같이 뉴스에 문제가 있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나라 응답자 2명 중 1명(50%)은 의도적으로 뉴스를 피하고 있으며, 특히 정치 뉴스를 피한다는 응답이 62%로 매우 높게 나타났다. 다른 나라는 나이가 어릴수록 뉴스를 회피하는 비율이 높은데, 우리나라는 50대의 뉴스 회피율이 20대보다 13%p나 높았다. 그런가 하면 진보 성향의 응답자(57%)가 보수 성향(47%)과 중도 성향(51%)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뉴스를 회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요컨대 특정 계층과 세대가 뉴스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뉴스를 피한다는 것인데, 특히 정치 뉴스에 대한 거부감이 크게 자리를 잡은 모양새라 걱정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응답자들의 뉴스 소비가 언론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포털이나 소셜미디어, 유튜브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특히 유튜브를 이용한다는 응답자는 53%에 달했는데, 이는 자신의 개인적 성향에 따라 뉴스를 선택적으로 소비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기성 언론을 활용하는 방식도 이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지만, 직접 검색을 하고 추천 알고리즘에 의존하면서 그야말로 뉴스를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고 있는 셈이다. 이는 스스로 다양한 뉴스에 노출될 기회를 차단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우려가 된다.
이런 식으로 개인화된 뉴스를 소비하기 때문에 뉴스 전반에 대한 신뢰도는 낮고, 개인이 이용하는 뉴스 신뢰도는 상대적으로 높을 수밖에 없다. 아주 큰 폭의 차이는 아니지만 이러한 차이가 난다는 것은 우리의 뉴스 소비 방식과 뉴스 소비 환경, 뉴스에 대한 인식에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장 뉴스 소비 방식부터 바꾸어야 한다. 우선 알고리즘에 기반한 개인화된 뉴스 구독을 멈추어야 한다. 그리고 좀 더 다양한 관점과 시각으로 세상을 보기 위해 다양한 뉴스를 활용해야 한다. 무엇보다 뉴스를 그대로 신뢰하지 말고 ‘사실 확인’을 하는 습관도 길러야 한다. 이것이 뉴스 문해력을 키우는 첫걸음이다.
“이제는 쉬운 한국어 쓰기 교육을 할 때이다.”
그래서 그런지 최근 들어 문해력에 관한 글을 자주 접하게 된다. 그런데 조금 당황스럽다. 마치 언어유희처럼 요즘 젊은 세대가 ‘고지식하다’를 ‘지식이 높다’로, ‘금일(今日)’을 ‘금요일’로, ‘무운(武運)을 빌다’를 ‘운이 없기를 빈다’로, ‘사흘’을 ‘4일’로, ‘심심(甚深)한 사과’를 ‘지루하고 재미없는 사과’로 잘못 알아듣고 있어 문해력 교육이 필요하다는 식인데, 정말로 그럴까?
개인적으로 이러한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심심한 사과’로 인해 불거진 문해력 논란은 그 말을 오해한 젊은 세대에게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냥 이해하기 쉬운 말로 “정말 잘못했습니다”라고 했으면 될 일인데 굳이 의례적인 말투를 사용한 것이 문제이고, 한자어를 사용해야만 격식을 차린 공식적인 말투가 된다고 생각한 시대착오적인 언어감수성이 더 큰 문제이다. 실제로 “심심한 사과를 표한다”라는 말은 건성(?)으로 사과할 때 쓰는 말이지 일상적으로 쓰는 말도 아니다.
사정이 이러한데 교육을 담당하는 정부부처에서는 지방대 살리기 정책이라며 연일 ‘글로컬’과 라이즈(RISE)를 외친다. ‘프라임(PRIME)’ 사업에 이어 ‘코어(CORE)’ 사업, ‘램프(LAMP)’ 사업에 이르기까지 외국어 일색이다. 공공분야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불필요하게 낭비하는 시간 비용이 적지 않다는 연구 결과를 제출해도, 국어기본법을 바꾸어 공공기관 언어 사용 실태를 평가한다고 해도 요지부동이다. 이러한 문제가 어제오늘에 생긴 일이 아니라 더 큰 문제이다. 그런데도 청소년의 문해력이 문제라고 할 수 있을까?
실제로 오늘날 우리 사회에 문해력의 문제가 더 심각하게 다가오는 진짜 이유는 문해력 교육의 부재 또는 부실로 인해 나타난 인지 편향적 사고가 사회적 갈등을 날로 부추기고 있다는 데서 찾아야 한다. 문장의 의미는 문장을 이루는 각 낱말의 의미와 말차례, 문맥에 영향을 받을 뿐만 아니라 글을 쓰거나 읽는 사람의 개인적, 사회적, 문화적 배경과 경험에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개인의 정치적 신념에 따라 똑같은 글을 읽어도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내가 옳고 상대가 그른 것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각자의 뉴스와 정보에 사로잡혀 서로의 다름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고 서로가 틀렸다고 날을 세우고 극한 대립을 이어가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특히 정치 뉴스를 외면하는 까닭은 정치 언어가 계층 갈등과 세대 갈등, 지역 갈등, 젠더 갈등, 종교 갈등까지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다. ‘협치’를 외치면서 ‘협치’하지 않는 정치 언어는 언론의 감시를 받기는커녕 언론을 스피커로 이용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뉴스가 제 기능을 하기 어렵다. 뉴스 문해력 교육, 더 나아가 대중매체 문해력 교육이 꼭 필요한 이유이다. 특정 매체에서 접한 뉴스가 의견인지 사실인지, 객관적인 근거가 있는 뉴스인지 아닌지 판별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기본적으로 문해력은 교육을 통해 향상될 수 있으므로 문해력 교육은 초등 교육 과정으로부터 시작해 평생 교육 과정으로까지 이어져야 한다. 문해력은 개인의 의사소통 과정뿐만 아니라 각종 매체에서 정보를 습득하는 과정에도 관여하고, 민주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시민의식을 키우는 밑바탕이 되기도 하며, 구직 과정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만큼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능력이다.
흔히 문해력은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으로 정의되지만, 그렇게 단순한 개념이 아니다. 문해력을 유네스코에서는 개인이 지식을 쌓고 잠재력을 키우며, 지역 사회와 더 넓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학습의 과정이라고 정의하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광범위한 인지능력으로 정의한다. 도덕적·정치적 측면에서도 문해력이 중요하다. 특정 글이 정치적으로 누구의 이익을 대변하는지, 도덕적으로 어떤 가치가 더 중요한지 분석하고 판단하는 비판적인 사고력이 문해력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문해력은 단순히 어휘력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도 요즘 젊은 세대가 거의 쓰지도 않는 말의 뜻을 모른다고 마치 큰 문제라도 생긴 것처럼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어쩐지 조금 민망하다. 요즘 젊은 세대의 신조어를 겨우 눈곱만큼 아는 기성세대로서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는 느낌마저 든다. 그 옛날 사설시조 ‘댁들에 동난지이 사오’에서도 언급된 바 있듯이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 어려운 한자어를 쓰면서 유식한 척하는 태도가 문제이다. 이러한 태도야말로 소통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세대차이를 줄이자고 기성세대에게 신세대의 언어를 가르치고, 신세대에게 기성세대의 언어를 가르칠 필요는 없다.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만 있다면 지역도 뛰어넘고 세대도 뛰어넘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 가지 걱정을 떨치기 어려운 것은 지난 2005년에 '국어기본법'을 제정하여 우리글과 우리말을 바르고 쉽게 쓸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했으나 여전히 공공언어와 방송언어가 바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쉽지도 않다는 것이다. 언어문화개선의 두 바퀴로 ‘국어문화원’과 ‘국어책임관’ 제도를 도입했지만 역부족이다. 마치 매년 재시동(리셋) 단추를 누른 것처럼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제야말로 ‘쉬운 한국어 쓰기’를 더 이상 운동이 아니라 교육으로 바꾸어야 할 때이다. 아울러 공문서 바로 쓰기 교육뿐만 아니라 언어 예절 교육과 문화 감수성 교육, 인권 교육의 영역에서도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 이 글은 (사)국어순화추진회 세종학연구원이 펴낸 '국어순화정책' 10호(2024. 7.)에 기고한 글이다.
김형주(글말생활연구소 소장・상명대 한국언어문화전공 초빙교수)